이때가 청일전쟁의 원인이 된 리훙장과 이토 히로부미 사이에 톈진조약이 체결된 직후이고.
러시아는 표트르 대제 이후 유럽의 신흥강국으로 부상했는데 부동항이 없는 지리적 한계로 인해 영토 확장을 위해서 노심초사했다.이미 시작된 갑오경장의 개혁마저 뒷걸음쳤다.
그리고 유니온 잭 기를 게양하고 포대를 구축해 병영을 건설한 뒤 군사기지로 만들고서 영국 해군장관의 이름을 따 해밀턴항으로 명명했다.영국군은 여기에 군사기지를 만들었다.한편 청은 거문도 사건의 해결에 중재자를 자처함으로써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더욱 강화했다.
이에 따라 크림전쟁이 끝나고 5년 후에 발발한 미국 남북전쟁(1861~65)에서 남군을 지원한 영국과 달리 러시아는 링컨의 북군을 지원했다.영국의 거문도 점령도 마찬가지 효과를 지녀 동북아 진출을 노리는 러시아에는 동양의 지브롤터와 같았다.
처음 200명이던 병사가 800명으로 늘고.
이에 따라 베베르 러시아 공사와 2주 만에 수호조약을 체결하고.그런데 띵루창의 눈에 집집이 사서삼경이 있고 경전을 읽는 사람이 많아 이에 놀란 나머지 ‘큰 문(巨文)이란 이름이 이때 생겨났다고 한다.
그런데 조선의 속국화에 관심이 많던 리훙장의 반대로 교섭이 더디어지자 조선과 직접 교섭에 나섰다.블라디보스토크보다 효용 가치가 높은 부동항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이때가 청일전쟁의 원인이 된 리훙장과 이토 히로부미 사이에 톈진조약이 체결된 직후이고.일본과 미국도 관망하거나 동조해서다.